엄마의 사랑은 애를 낳으면 비로소 알게 된다고들 하던데, 나는 애가 없는 관계로 결혼을 하자마자 하나씩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엄마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존재인지, 엄마한테 얼마나 미안했던 건지.. 지금 생각해도 웃기지만 그 깨달음의 가볍고 소소한 첫 단계는 남편이었다.
밥 차리고 밥 먹으라는데 대답만 하고 몸땡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남편을 보며, 죽어도 안 먹을 듯 거부하더니 갑자기 튀어나와 밥 있냐고 무뇌스러운 질문을 하는 남편을 보며.. 내가 엄마에게 했던 똑같은 무뇌 행동들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더라. 그땐 정말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내 멋대로 밥 있냐고 물어보고.
그게 얼마나 짜증나고 지치는 일상인지 몰랐다. 아무리 나는 엄마 새끼라서 팔이 안으로 굽는다 해도 말이다. 좀 더 노력해서 최소한의 요리 정도는 스스로 해보려 하거나 해주고 싶어 하는 남자랑 결혼할걸..
결혼 전에는 엄마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딸에 대한 감정적 의지가 너무나도 강했던 우리 엄마.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엄마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엄마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던 것이었어. 단지 엄마도 힘든 시기가 있었고, 나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 힘든 순간들을 나도 비슷하게나마 겪어보기도 하니까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나더라. 못된 과거의 나.
엄마는 내가 3살때부터 유치원에 들어가기까지 여기저기 나를 맡기고 출근을 하셨다. 중간에 어린이집도 갔었나? 그건 기억이 나지 않네. 한 장면처럼 항상 기억이 떠오른다. 나무로 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어떤 할머니가 나한테 사탕을 주며 반갑게 맞이해주시고 엄마는 어색하게 폼을 잡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걸 물어보니 내가 3살 4살 사이일 때였다고 한다.
유딩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때는 엄마가 나를 회사에도 데리고 가서 한쪽 책상에 앉혀놓고 일을 하시곤 했다. 의류 관련 회사여서 엄마는 패턴을 그리고 원단을 만지고 마네킹과 의상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렇게 일하고 바쁘고 항상 모임에 나가는 엄마의 모습이 어릴 적부터 익숙했다.
유치원 소풍을 갈때는 요리를 해주시기보다는 김밥이나 과자 음료수를 잔뜩 사서 보내고 아빠랑 같이 나를 픽업해주고 그랬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엄마는 김밥도 집에서 만들지 못할 정도로 정말 많이 바빴다.
초등학교 때는 내가 산수와 수학에 실력이 좋아서 소규모 고급반 수학학원에 보내주기도 하셨다. 피아노 학원도 일찍이 등록시키고. 과외도 하고, 그 당시 또래 중에서는 나름 즐기기도 하고 열심히 배우기도 하고, 엄마가 바쁜 와중에 나를 많이 끌고 다니셨다.
초등학교 4학년때 부반장을 했었는데, 사실 그 당시는 국민학교. 내 흐린 기억에 난 그때가 가장 못돼 먹은 아이였던 것 같다. 내 생일파티에 반 친구들을 잔뜩 불러놓고 엄마가 출장부페를 시켜주셨었다. 애들이 부럽다고 음식 최고라고 난리 치고 먹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내가 아이들을 이끌고 놀이터에도 줄지어 가고 그랬었는데, 당시에 가난한 친구가 생일선물을 준비하지 못하고 참석했었는데, 어리고 못된 그때의 나는.. 그 친구를 - 못된 시어머니가 며느리 편한 꼴 못 보는 것 마냥 - 말 한마디로 괴롭힌 적이 있다.
다행.. 엄마가 브레이크를 걸어줘서 난 절대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제대로 배웠었다. 사고 쳐봐야 아는가 보다. ㅋㅋ
내가 처음 브라를 착용할때도, 초경을 경험할 때도 엄마는 나를 아끼는 인형처럼 보살피고 챙겨주셨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감싸주고 다치거나 무서워해도 아무 일이 아닌 듯 안심을 시켜주셨다. 그때의 엄마는 그랬다. 이제 와서 보면 엄마는 꽤 안정적으로 교육을 하는 좋은 엄마였다.
엄마가 전업주부가 아니셨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엄마의 모습은 일을 열심히 하고, 즐기고 바쁜 느낌이었다. 엄마아빠는 전형적인 자수성가에 성공한 부부의 모습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꽤 넉넉한 집안이었고 나는 엄마가 줄듯 안줄듯 자주 챙겨주는 용돈으로 명품에도, 명품 화장품에도 눈을 일찍이 떴다. 물론 눈을 떴다고 막 사고 그러진 않았다. 돈을 얼마가 있을때 얼마를 써야 하고, 왜 쓰지 말아야 하는지 절제하는 과정을 배우는 자체가 생각을 약간 다르게 만들었던것 같기도 하다. 일찍 알게 된 만큼 나이 들어서는 어떤 친구들처럼 광분해서 명품을 사는데 눈 돌아가고 그런 적은 없던 것 같다.
엄마는 돈을 주로 맛있는 음식에 쓰는데 가치를 두는 편이었던것 같다. 그리고 장애인을 채용하기도 하고, 교회에 봉사도 많이 하고 선교활동도 열심히 하셔서 해외에도 자주 나가시곤 했다. 주변 사람들을 항상 챙기고, 외할머니에게도 참 잘하셨다.
엄마 아빠는 주변에서 부러워하고 인정하는 꽤 괜찮은 가정을 만든 부부였다. 그 시기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가 나름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좀 더 커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엄마 아빠 대단한 사람들이었더라..
나는 나름 유복하고 화목한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오히려 성인이 되면서 겪은 모든 감정과 상황들에 비교적 의연할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한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해본 적도 없고.. 이것만으로도 참 감사하지.
돈에 대한 생각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막말로.. 거지 같은 생각보다는 효율적인 생각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복에 겨워서 사춘기도 심하게 앓기는 했다. 참내... 너무 미안하네 엄마 아빠한테...
나를 그렇게 키워주면서도 엄마는 시월드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꽤 크고 심각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내 기억에 친할머니는 못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깊게 박힐 정도로 그때의 친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조금 나쁘셨다. 몸을 힘들게 하기보단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셨던 것 같다. 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아빠가 엄마한테 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빠가 엄마에게 잘하는 이유 중에 일부는 그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나는 친가 가족들과 가까워지는 게 어려웠다. 물론 분위기는 좋았지만 그냥 마음속으로는 외가만큼 가깝게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게 늘 아쉬웠다. 엄마가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나에게 내려왔기 때문에, 분명한 이유도 없이 그저 무섭고 불편한 곳이었다. 할머니가 계시는 동안은..
물론 언니 오빠들이 이뻐해 주고 잘해주고, 고마웠던 순간들도 많다. 일찍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된 사촌언니가 특히 나를 챙겨주고 많이 친했었는데, 언니가 사라지고 나서는 재미도 없고 더 가기 싫어졌던 것 같다. 또 다른 사촌언니 자매도 나를 이뻐해주고 선물도 보내주고 그랬었는데. 나는 왜 보답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엄마는 일을 놓고 나서 변했다. 그게 40대 후반이었나?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즈음에 뭔가 힘든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경제적인 부분도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그보다는 마음 아픈 일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몸도 고장이 나기 시작하고 병도 생기고.. 힘들어하셨다.
가장 속상하고 엄마에게 미안한 부분은. 아빠를 그대로 닮은.. 강한 성격의 나를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틀리거나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되면 절대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인 내가.. 엄마에게 지구 끝까지 갈 기세로 따박따박 대들고, 이기지 않으면 버티지를 못하는 그 못돼 먹은 성질을 엄마에게 다 보이고 퍼부은 적도 많았다. 이 부분도 남편의 행동을 통해 과거의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랑해주고 아껴준, 가장 친한 친구인 내 엄마에게.. 감사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말이다. 모든 딸이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된다. 한 살이라도 더 먹어야 알게 된다. 그게 너무나 미안하고 가슴 아프네.
엄마 지금도 너무나 미안하고 감사하지만, 지난 날의 나를 용서해줘요 :)
댓글